| 마을공동체의 확인, 복원, 재창조 – 수곡동 사례를 중심으로 문재현 마을배움길연구소장 공동체를 위한 지식체계 개인적 실천이든 집단적 실천이든 어떠한 실천은 지식체계의 인도를 받기 마련이다. 나 역시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활 속의 지식체계와 학문적 지식을 다양하게 검토해야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지식체계는 전통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온 유학지식이었고 근현대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과학적 지식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체계는 공동체 운동을 벌여나가는데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유학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남성주의적 지식체계였기 때문에 보살핌과 소통을 중심으로 평등한 공동체를 위한 기획에 맞지 않았고 개념을 중심으로 한 과학지식은 삶의 관계성과 구체성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지식체계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었고 우리 삶의 맥락을 연결할 수도 생명력을 부여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지식체계는 우리가 민속이라고 부르는 생활지식, 지역 지식이었다. 그래서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두 가지 실천을 진행하였다. 하나는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을 찾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문화 안에서 공동체를 확인하고 복원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을 찾는 것이었다. 렌즈와 놀이, 마을 걷기 1999년은 지난 천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천년의 비전을 찾기 위해 많은 토론회와 행사가 열리던 해였다. 그 가운데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지난 2천 년 동안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발명에 관한 설문이었다. 그 설문 응답은 『지난 2천 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발명으로 꼽힌 것이 세 가지다. 인쇄술 및 인쇄 기계, 컴퓨터 그리고 렌즈다. 지난 천년 간 인쇄술이 끼친 사회적 변화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고, 컴퓨터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에서 그 설문 결과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렌즈라니. 처음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겠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렌즈가 없으면 안경도 없을 것이다. 안경이 있어서 눈이 나쁜 사람이나 노인들도 책을 읽고 밤에도 활동할 수 있다. 안경으로 인간의 경제활동이 두 배 이상 늘어났고 노인들이 70~80세가 넘어서까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오늘날의 장로사회를 만들었다. 안경이 일상생활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면 망원경은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망원경이 없었다면 인간은 태양계의 구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우주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미경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세포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고, 유전자와 뇌의 구조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렌즈는 문화생활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렌즈가 없었다면 카메라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사진 예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역시 카메라로 찍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문화생활 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렌즈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할 것은 이러한 렌즈의 혁명적 역할이 아니고, 렌즈가 가져온 삶의 왜곡에 관한 것이다. 렌즈는 학문이나 교육이 우리의 일상적 삶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하게 했다. 장소에 뿌리박고 구체적으로 교류하는 것들은 최근까지도 학문과 교육의 중요한 영역이 아니었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태양계의 규모, 은하계의 크기 같은 것들은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깨닫게는 했지만 삶을 너무 왜소하게 만들었다. 거시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 삶은 티끌처럼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원경은 인간을 자신이 맺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소외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현미경으로 본 세계에서 일상적 삶이 중심주제가 되기 어렵다. 그것은 아플 때나 전염병이 유행할 때 주목하는 주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렌즈는 수없이 많은 과학적인 질문을 해결했지만, 인간의 내적 삶과 사회적 관계망과 관련해서는 큰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행복감은 더 줄어들고 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서로를 사랑하고 지지하면서 생겨나는 것이지 과학적인 이치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소에서 맺는 구체적인 감각적 관계가 회복돼야 한다. 요즘 교육과 학문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장소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물으면 된다. 20여 년 전 수능시험을 마치고 할머니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에 온 두 조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시간쯤 이야기하다가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줄 모른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너는 삶의 목표를 어떻게 잡고 있니?” “네가 생각하는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해보자” “너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가 사는 부산을 공부해본 적 있어?” 서태지나 배우들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던 조카들이 이런 질문이 나오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큰 조카는 눈물을 흘렸고 작은 조카는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그런 질문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받아본 적이 없고 해야 할 필요를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많은 청소년에게 같은 질문을 했지만,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사들을 포함한 어른들에게도 이러한 질문을 해보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고 삶의 계획을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다. 이는 소위 공동체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정부나 교육청에서 하는 마을 살리기 운동에 참여하는 학자가 여럿 생겨났다. 그들에게 공동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개념과 실현 방법에 관한 내용을 명료한 언어로 표현한다. 이와 달리 실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서 공동체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공동체 운동을 함으로써 무엇이 좋았는지 물으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온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신나게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고, 뭔가 넘쳐 오르는 느낌이 있다. 이와 달리 학자들은 아무 말을 못 하거나 더듬거리며 눈에 초점을 잃는 경우가 많다. 갑자기 분위기가 식으면서 공허해진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나는 걸까? 이는 공동체를 설명하는 지식체계는 명시적인 지식이다. 이와 달리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지식은 암묵적인 지식일 수밖에 없다. 암묵적 지식이란, 몸으론 할 수 있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지식체계를 말한다. 서로 좋아하는 느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느끼고 공유하는 감각과 생각을 거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지식체계로 표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을이 공동체다.’라고 할 때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갖도록 기대하고, 지지하고, 일체감을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환대받을 때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서로 접속하게 되고, 스스로 ‘우리’의 부분임을 느끼며 소속감과 일체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에 대한 참여와 믿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사는 장소에 대한 애착과 그 안에서 사는 즐거움과 분위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에 대한 경험은 이야기로는 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와 관련된 지식을 공유지식, 공통감정, 공통감각으로 정리한다. 공유지식이라는 것은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고.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고,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다 안다는 형태의 지식이다. 이런 공유지식에 속하는 것이 민속, 통과의례, 세시풍속 등이다. 그러한 지식은 그 공동체에 참여하고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외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고 배우기가 쉽지 않다. 숟가락, 젓가락으로 밥 먹는 것 우리는 그것을 중요한 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외국 사람들이 이것을 배우려면 쉽지 않은 것처럼. 공통감정이란 내가 느끼고, 너도 느끼고, 너와 내가 함께 느낀다는 것을 서로 느끼고, 우리가 함께 다 같이 느끼는 그런 감정을 말한다. 명절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그런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일체감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공동체 운동은 글이 아니라, 말 그리고 몸의 감각에 근거한 실천이 중요하다. 수곡동뿐만 아니라 내가 운영하고 있는 마을배움길연구소가 진행하는 실천은 그래서 이론적 개념과 방법을 출발하지 않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마을 나들이, 놀이, 이야기, 세시풍속을 통한 이웃들과 관계 맺기이다. 수곡동 마을 만들기에서 여러 세대가 함께 참여하면서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마을 나들이 곧, 걷기이다. 그 시작은 한솔초등학교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 진행하는 유초연계 프로그램의 핵심도 나들이이다. 요즘 수곡동의 길거리와 공원은 만남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노인들의 아이들 보살핌 프로그램 역시 마을 나들이가 기본이 된다. 아이들은 자기가 학교에 오는 길을 걸어가면서 선생님에게 안내하고 설명을 한다. 선생님은 질문할 뿐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 집에 가는 길부터 어디에 친구가 살고 있는지, 자기가 평상시 어디에서 놀고 있는지, 어떤 지역아동센터에 다니고 있는지, 부모와 어떤 음식점에 다니는지 재잘재잘 떠들고, 교사는 경청하는 과정에서 마을과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아이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듣고 있는 교사의 모습에서 마음을 열고 곁을 준다. 걷기와 이야기는 그렇게 행복하게 결합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놀이이다. 놀이는 학문적 사유에서 선행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공통감각을 형성한다. 놀이하면서 우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감각적인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운동은 놀이라는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삶의 뿌리에 놓인 정신적 흐름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에 내재된 정신적 뿌리가 개인에 의해서 경험되고, 깨닫고, 꾸준히 재창조될 때만 지속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놀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열리고 공통감각과 감정, 공유지식이 뿌리내린다. 민속연구와 실천의 새로운 방법을 찾아 민속을 공동체 복원의 핵심적인 지식체계로 생각은 했지만, 민속학의 접근방법과 내 실천적 요구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기 전에 민요와 놀이에 관한 연구는 두 가지 접근방식이 있었다. 먼저 학문 중심의 연구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 연구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가사에 관한 연구는 국문과에서 하고, 장단과 가락에 관한 연구는 음악과에서 했다. 그런 내용을 분과 학문의 요구에 맞게 수집 정리한 다음 그것을 텍스트로 삼는다. 실제 삶의 맥락이나 그것이 마을에서 사람들한테 주는 의미 같은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연구 방법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이 현장 중심의 연구 방법이다. 우리 연구소하고도 깊은 관계를 맺었던 임재해 교수가 이 연구 방법을 대표한다. 이 입장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분과 학문적 접근이 민중들의 삶을 통합적으로 조망할 수 없기 때문에 컨텍스트(context), 즉 마을 사람들의 삶의 맥락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주창한다. 민요를 연구할 때 가사나 가락뿐만 아니라 실제 노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관계가 그 노래를 통해서 어떻게 고양되고 어떻게 공동체적인 삶의 계기로 작동하는지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장 연행이 중시된다. 사람들의 동작과 표정, 반응들 전체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변화다. 우리도 현장을 통합적으로 보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현장 중심 연구 방법도 한계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깨달은 바는 무엇일까? 현장 중심의 연구 방법은 기존 학문의 식민성을 비판한다. 인류학은 식민지 본국의 학자가 식민지 지배국의 시선으로 식민지를 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또 기존의 분과 중심의 연구는 도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시골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내부 식민지 논리에 따른 자료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도시에 있는 학자가 현장에 가서 자료를 탐색해서 분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현장 중심의 학문 방법이나 분과 중심의 학문 방법이나 똑같다.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는데, 현장 중심의 연구 방법과 도출된 결과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지식이나 인간관계의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민요와 놀이가 그렇게 연구해서는 살아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중심의 현장 연구 방법을 내세웠다. 그 문화가 전승되는 마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야 문화유산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의미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승되고 동네 어른에서 아이들로 전승되고 언니, 오빠에서 동생들로 전승되는 이 문화 과정을 살려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이들 놀이와 노래를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노동요는 농업 기술의 변화와 인간관계의 해체 속에서 다시 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이 어르는 소리나 아이들의 놀이는 그렇지 않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인류라는 종이 유지되는 한 영원한 삶의 가능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살릴 수 있는 진정한 문화유산은 아이 어르는 소리와 놀이라고 보고 이를 연구와 실천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한 문화유산이야말로 개인의 발달과 학교 교육, 공동체의 복원에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개인·공동체)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글의 앞쪽에서 공동체를 위한 지식체계는 명시적 지식이 아니라 암묵적 지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암묵지는 ‘몸에 밴다.’라는 말처럼 행동 때문에 체험되는 지식을 가리키는데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개인적 경험이나 노하우, 이미지, 숙련된 기능 등 조직문화나 풍토 안에 내재된 지식을 말한다. 우리가 서로 수다를 떨고 놀이를 하고 문제해결을 하기 위해서 같은 방법을 모색하면서 공동감각을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암묵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공동체는 암묵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명시지 조차도 암묵지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암묵지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요구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성이 암묵적 지식의 본질이다. 오늘날 일본의 노나카는 암묵지와 명시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식이 창조된다고 보았으며 이 상호작용 관계를 네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공동화, 표출화, 내면화, 연결화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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